영화평론가로서 일로서, 또 취미를 겸해 매달 많은 영화를 만나게 된다. 그중 몇은 홍보활동의 도움을 받아, 또 본연의 힘으로서 대중에게 제 존재감을 새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특별한 존재감을 발하지 못하고 스러지니, 나는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 한 해 정식 상영한 작품수가 무려 1400편을 넘어선다. 천만 영화 두 편 <파묘>와 <범죄도시2>를 필두로, <인사이드 아웃2>, <베테랑2>, <파일럿>, <웡카>, <탈주>, <듄: 파트2>, <에이리언: 로물루스>, <데드풀과 울버린>이 흥행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어디 모두 웃기만 했을까. 목록을 반대로 볼라치면 관객을 채 1000명도 모으지 못하고 쓸쓸히 문을 닫은 작품이 무려 900여 편에 이른다. 상영관 하나, 관객수 1명을 등록하고 바로 2차 판권 시장으로 진입하는 영화들을 제하더라도 수백 편의 작품이 대중과의 접점을 마련하지 못한 채 극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현실이다. 말하자면 한 해 상영작 가운데 대중의 선택을 받는 영화는 지극히 소수란 이야기다.
올 한 해 개봉작 가운데 기억할 만한 영화가 어디 최고 흥행작뿐일까. 지나간 한해를 되돌아 그래도 한국사회에 나름의 영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 그와 같은 작업이 절실한 요즘이다.
그리하여 2024년 개봉작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좋은 작품 몇을 추려 이야기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유달리 극장개봉작보다 영화제에서 만난 작품이 훨씬 나은 한 해가 됐으나 개봉작 가운데서도 언급할 만한 작품이 없지 않다. 다음은 2024년 개봉작 중 '씨네만세'가 추리는 상위 3편의 영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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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포스터 |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흥행면에선 실패에 가까운 성적을 거뒀다. 올 5월 개봉한 이 영화는 조지 밀러의 2015년 작 <매드맥스>의 스핀오프격 작품으로, 395만 명의 관객이 들며 선풍적 인기를 끈 전작의 인기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됐다. 무엇보다 본편의 주인공인 맥스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여성 캐릭터 퓨리오사의 이야기를 분리해 장편화했단 점에서 화제성 또한 충분했다.
본편이 이룩한 해방과 혁명의 이야기로부터 나아가 본편이 받았던 오해, 즉 여성주의의 비좁은 틀 안에 갇힌 왜곡된 해석을 깨뜨리는 진정한 인간승리의 이야기를 이 영화가 이룩해낸 것이다. 남녀의 갈등을 넘어 더 나은 인간을 향한 도전적 발걸음의 이야기로 화한 작품은 시대와 성별을 넘어 언제고 통할 밖에 없는 감동적 드라마로 갈무리됐다.
액션의 비중이 줄어든 대신 전편보다 복합적인 드라마가 가미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조지 밀러의 역작으로 기록될 만한 걸출한 작품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세간의 평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어김없이 이어진 캐릭터의 성별에 국한된 해석이 피로감과 반감을 조장했고, 도리 없이 줄어든 액션신 또한 작품이 전편만 못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탓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여든 노인 조지 밀러가 여전히 청년처럼 팔팔 끓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증명해낸 걸작이다. 전작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60만 관객, 1400여 개의 스크린을 가동하고도 박스오피스 최상단에 오르지 못한 이 영화의 흥행성적을 나는 몹시 아쉽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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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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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야 할 일 포스터 |
ⓒ 명필름 |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해야 할 일>이 동원한 관객수는 4443명. 흥행순위를 굳이 매겨보자면 334위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이가 시사회와 각종 상영회를 제하면 채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건 이 작품만큼 2024년 한국사회에 유효한 영화를 얼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홍준 감독은 직접 겪었던 조선소 인사팀 경험을 바탕으로 구조조정과 그로부터 이어진 노조해체 시도, 사내정치, 부당한 탄압 이야기를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한국사회에서 중후장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만큼 소외돼 왔는지를 알고 있는 이라면, 또한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지는 불법적 노조탄압 시도가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해악을 미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이 한국에 얼마나 필요한 작품인지 공감할 수 있을 테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이야기하자면 박홍준의 연출은 켄 로치의 한국적 변용이라 말할 수도 있을 테다. 빗대기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고, 또 제 나름의 연출적 미학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 공동체 가까이 다가가 사회적 필요와 관심이 간절한 순간을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켄 로치를 떠올릴 수 있다. 사회와 괴리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정치로부터 격리된 인간은 노예화될 뿐이다. 영화는 바로 이 두 가지 자명한, 그러나 무시되기 쉬운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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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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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
ⓒ 티캐스트 |
이 영화를 두고 오래 고심했다. 단 세 편을 뽑으려 마음을 정했건만, 이 자리를 두고 떠오르는 작품이 워낙 많았던 탓이다. 한국영화 한 편에 자리를 내어주고자 하지 않았다면 무리 없이 들어갔을 이 영화가 또 다른 훌륭한 작품을 밀어두고 올릴 만한 것인지를 거듭 따져보았다.
이를테면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성격의 영화로 <서브스턴스>가 있고, 또 영화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찰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도 있다. 칸이 선택한, 다 떠나서 그저 재밌기로만 하자면 올해 제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도파민 팡팡 터지는 <아노라>도 있었고, 올해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올해의 독립영화'로 한 표를 행사한 홍상수의 <수유천> 또한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뽑지 않을 수 없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조지 밀러라는 감독의 격을 다시 보게 했고, <해야 할 일>이 오늘 한국에 더없이 필요한 작품이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가장 많은 이에게 효과적으로 다가선 영화라 여기기 때문이다. 단단히 잠긴 문을 대하여 첫째는 뜯어내고, 둘째는 열어 달라 호소하는 식이었다면, 이 영화는 차분히 자기를 내보여 마침내 문을 열어내게 했달까.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의 공공화장실 청소부의 이야기다. 그의 일상이란 무척이나 단순한데 출근하여 2인1조로 공원 등 공공화장실 여러 곳을 돌며 청소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화장실과 화장실을 옮겨 이동할 때 자동차 안에 놓인 카세트테이프를(맞다, 카세트테이프다!) 꺼내 듣는다. 테이프엔 흘러간 팝송들이 담겨 있는데 그 정취가 카세트테이프란 형식과 꼭 맞아떨어지는 듯도 하다.
홀로 사는 그는 퇴근 후엔 단골가게에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고,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바를 찾아 사람들 노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날 좋은 날 공원 한 구석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또 헌책방을 찾아 세상에 잘 알려지지 못한 좋은 글을 추려 읽는 것, 그와 같은 소소한 일상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한달까.
영화는 제목처럼 완벽해보였던 그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손님이 들며 벌어지는 일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삶의 모양과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지난 굴곡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적절한 감성을 보여주는 작품, <퍼펙트 데이즈>는 꼭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열어젖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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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모두 세 편의 영화를 추려 소개한다. 혹자는 '더 좋은 영화가 있었는데' 하며 아쉬워 할 수 있겠고, 또 누구는 '에이, 어떻게 이게 올해의 영화야' 하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곁의 누구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는지. 이게 나의 올해의 영화라고, 너의 올해의 영화는 무엇이냐고. 불행과 불운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이러한 세상에선 멋진 이야기가 더욱 많이 회자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럼 2024년 한 해 '씨네만세'를 애정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