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재수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번 모의고사 성적으론 어림도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도 모르는 문제는 끝까지 풀 수 없었습니다. 특히 15번 문제 하나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죽어라고 풀었는데, 다 풀고 나니 답이 X는 4a였습니다. 그런데 보기엔 1번이 a, 2번이 2a, 3번이 3a, 4번이 0. 이게 무슨 일이죠? 제 답 4a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황당해서 보고 있는데 시험지를 걷어갔습니다. 전 이제 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2등급에서 1등급! 그 단 1점이 저한테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가진 것 없는 놈이 성공하는 건 공부뿐이라고, 저 서울대가는 희망으로 사신다는 아버지의 술 취한 목소리가 떠나질 않습니다. 전 앞으로의 실패를, 그것에 실망하실 부모님의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제 심장이 제 머릿속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소리가...... (지우면서) 아, 이건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수환아! 미안해. 니가 갖고 싶어했던 아이패드 내 동생 줄게. 미안하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저는 다가올 중간고사가 너무 무섭습니다. 모의고사는 더 무섭습니다. 아 참. 선생님께 부탁드리건데 요즘 나오는 성적 비관 자살 뉴스에는 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15번 문제 답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풀어봐도 X는 4a였습니다.

(책상 위로 올라가다가 강한 바람소리가 나면 김명준은 옥상 높이가 아찔하다는 듯이 다시 내려온다. 유서를 제외한 모든 소품은 가방 앞 주머니에 넣는다. 다 챙긴 가방은 가장 우측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유서를 책상에 놓고 책상 위로 올라간다.)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리면서) 숨고 싶은데, 숨을 곳이 없어서! 전 이렇게 영원히 도망칩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이면 저는 어떡하죠? 부디 다음 생에는… (강한 바람소리가 들리면 순간적으로 휘청거린다. 동시에 유서를 발로 차서 객석 쪽으로 떨어뜨린다.) 어휴, 죽을 뻔 했네. 어? 내 유서! 아, 아저씨! 네! 안녕하세요? 예. 그 종이 제 거예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 보지 마세요... 보지마시라구요. 보지마세요! 아! 보지마! 아니, 왜 남의 걸 읽고 그래! 아이씨 짜증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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